600만 파리 시민은 어떻게 파리 카타콤에 잠들게 되었을까

당페르로슈로 아래의 유골은 원래 관광객에게 보여 주려고 모아 둔 것이 아니었어요. 18세기 후반 파리가 안고 있던 두 가지 문제, 즉 도시가 자기 채석장 속으로 가라앉고 묘지는 더 이상 쓸 수 없을 만큼 붐비던 상황에 대한 해결책이었죠. 이 페이지에서는 전설은 빼고 이야기를 순서대로 따라가 봐요.

도시를 위한 돌, 그 아래 생긴 구멍

옛 파리의 상당 부분은 센강 좌안 바로 아래에 묻혀 있던 연한 빛깔의 석회암으로 지어졌어요. 지질학자들은 이 돌을 로마 시대 파리의 이름 루테티아를 따서 루테티안 석회암이라고 불러요. 채석공들은 중세부터 이 돌을 캐냈어요.

처음에는 노천 채석장에서 작업했어요. 도시가 채석장 위로 넓어지자 채굴은 지하로 들어갔고, 남겨 둔 암석 기둥이 받치는 긴 갱도를 따라 돌을 캐 나갔어요. 수백 년이 지나면서 터널은 여러 동네 전체의 아래로 뻗어 나갔어요.

옛 채굴 터는 파리 지하로 약 300km에 이르러요. 이 옛 채석장 네트워크에 비하면 오늘날 방문객이 걷는 구간은 아주 작은 일부예요.

거리가 무너져 내리기 시작했을 때

1770년대가 되자 버려진 갱도는 실제 위험이 되었어요. 옛 채석장 위의 도로 일부가 무너졌고, 집들도 함께 내려앉았죠. 더 이상 이 구멍들을 남의 일로 여길 수 없게 된 거예요.

1777년 왕실은 채석장의 지도를 만들고 보강하는 일을 맡은 기관 Inspection Générale des Carrières(채석장 총감독국)를 세웠어요. 이곳 인부들은 거리 아래에 벽과 기둥을 쌓았어요. 관람 동선의 일부 갱도에는 지금도 새겨 넣은 거리 이름과 연도가 남아 있어요.

더 이상 쓸 수 없게 된 묘지

지상에서 파리는 또 다른 문제를 안고 있었어요. 오늘날 레알 근처에 있던 Cimetière des Innocents(이노상 묘지)는 수백 년 동안 여러 교구의 망자를 받아 왔고, 심각할 만큼 포화 상태였어요.

이웃 주민들은 냄새와 근처 지하실로 스며드는 습기에 대해 불만을 터뜨렸어요. 몇 년에 걸친 항의 끝에 묘지는 문을 닫았고, 당국은 그 안에 있던 것을 옮길 곳을 찾아야 했어요.

해답은 옛 도심의 남쪽에 있었어요. Tombe-Issoire 지역 아래의 채석장은 비어 있었고 이미 보강 공사가 진행 중이었어요. 붐비는 도심에서 멀리 떨어진 곳, Barrière d'Enfer라는 통행세 관문 가까이에 있었죠.

밤에 옮겨진 유골

1786년부터 이노상 묘지의 유해를 파내 남쪽으로 실어 날랐어요. 이송은 밤에 이루어졌고, 채석장에 도착한 유골은 수직 갱을 통해 아래 갱도로 쏟아 넣어졌어요.

이후 수십 년 동안 파리의 다른 교구 묘지들도 같은 방식으로 비워졌어요. 납골당에는 모두 합쳐 약 600만 명의 유해가 잠들어 있어요. 모든 가이드와 투어 상품 설명이 이 숫자를 되풀이해요.

그 사람들 가운데 이름을 알 수 있는 경우는 거의 없어요. 지하의 명판에는 각 구역의 유골이 어느 묘지에서 왔는지와 이송 날짜가 적혀 있는데, 기록이 담아낸 개인적인 정보는 그 정도가 전부예요.

600만이라는 숫자는 옛 묘지 기록을 바탕으로 한 추정치이지, 해골을 하나하나 센 결과가 아니에요. 정확한 숫자라기보다 규모를 가늠하는 값으로 받아들이세요.

검고 흰 기둥 사이 상인방에 Arrête, c'est ici l'empire de la mort가 새겨진 파리 카타콤 납골당 입구

해골과 긴 뼈로 쌓은 벽

처음에 유골은 무더기로 쌓여 있었어요. 방문객들이 사진에 담는 가지런한 배열은 19세기 초 채석장 관리 기관을 이끈 Louis-Étienne Héricart de Thury 시절에 생겨났어요.

그의 작업반은 긴 뼈를 벽처럼 쌓고, 그 사이에 해골을 줄지어 박아 띠와 무늬를 만들었어요. 그 반듯한 겉면 뒤로는 나머지 유해가 갱도 안쪽 깊숙이 아무렇게나 쌓여 있어요.

그는 죽음과 시간의 흐름을 다룬 시구와 인용문을 담은 명판도 더했어요. 대부분 프랑스어나 라틴어여서, 이를 번역해 주는 가이드가 있으면 관람이 훨씬 풍성해져요.

멈추라고 말하는 입구

납골당 본관 입구에는 지하에서 가장 많이 인용되는 문구가 있어요. 문 위에 새겨진 “Arrête ! C'est ici l'empire de la mort”는 대략 “멈춰라! 이곳은 죽음의 제국이다”라는 뜻이에요.

이 문에 이르기 전까지는 아무것도 없는 채석장 구간을 한참 걸어요. 문을 지나면 유골이 시작되어 출구 가까이까지 거의 끊이지 않아요. 각 구간이 어디쯤인지는 관람 동선을 단계별로 정리한 페이지에서 볼 수 있어요.

납골당은 1800년대 초부터 방문객을 받았지만, 처음에는 가끔 있는 일이었어요. 시간이 지나면서 파리의 박물관 가운데 하나가 되었고, 지금은 Paris Musées가 운영해요.

채석장 이야기를 가이드에게 직접 들어 보세요

Walks는 최대 14명 그룹으로 약 2시간 동안 역사를 들려주고, 지하 예배당과 채석공의 조각 같은 특별 구역도 둘러봐요.

지옥을 떠올리게 하는 이름

입구 위의 광장에도 나름의 역사가 있어요. 옛 통행세 관문의 이름은 Barrière d'Enfer였고, Enfer는 프랑스어로 지옥이라는 뜻이니 망자에게 이르는 문에 꼭 어울리는 이름이었죠.

나중에 광장은 벨포르 포위전의 영웅인 당페르로슈로 대령의 이름을 따서 바뀌었는데, 새 이름도 발음이 거의 같아요. 광장의 나머지 이야기는 Place Denfert-Rochereau 위키백과 문서에 나와 있어요.

가이드와 함께하면 이야기가 더 와닿는 이유

약 42달러부터인 자유 관람 입장권으로도 오디오 가이드와 함께 입장할 수 있고, 기본적인 내용은 충분히 알려 줘요. 하지만 특정 명판 하나나 벽에서 발견한 조각에 대한 질문에는 답해 주지 못해요.

약 155달러부터인 Walks의 특별 입장 투어는 가이드에게 역사를 들을 수 있는 가장 저렴한 방법이에요. GetYourGuide에서 1,000+개 리뷰에 평점 4.7을 받고 있고, 일반 방문객에게 닫힌 구역도 열어 줘요.

저희의 추천인 Memories France는 잠긴 문 너머에서 그룹을 최대 7명으로 유지해요. 두 투어의 비교는 그룹 규모 가이드와 가격 페이지에 정리되어 있어요. 입장권과 두 투어를 함께 저울질한 내용은 입장권과 라이브 가이드 비교 페이지에 있어요.

가족이라면 예약 전에 아이와 함께 납골당에 가는 법을 먼저 읽어 보세요. 같은 역사라도 열 살 아이에게는 어른과 다르게 다가와요.

뼈 뒤에 숨은 이야기

유골에 대해 방문객이 자주 묻는 질문

파리 카타콤에는 왜 유골이 있나요?

18세기 후반 도시의 묘지들이 넘쳐났기 때문이에요. 1786년부터 이노상 묘지(Cimetière des Innocents)의 유해가, 이후에는 다른 교구 묘지의 유해도 도심 남쪽의 옛 석회암 채석장으로 옮겨졌어요.

카타콤에는 몇 명이 묻혀 있나요?

일반적인 추정치로 약 600만 명이에요. 실제로 센 숫자가 아니라 묘지 기록을 바탕으로 한 값이니 규모를 가늠하는 정도로 보세요.

유골을 벽처럼 쌓은 사람은 누구인가요?

긴 뼈와 해골로 쌓은 가지런한 벽은 19세기 초 채석장 관리 기관의 책임자였던 Louis-Étienne Héricart de Thury 시절의 것이에요. 그 전에는 유골이 무더기로 쌓여 있었어요.

납골당 입구의 문구는 무슨 뜻인가요?

Arrête ! C'est ici l'empire de la mort, 대략 멈춰라! 이곳은 죽음의 제국이다라는 뜻이에요. 유골이 시작되는 문 위에 새겨져 있어요.

가이드에게 역사를 들을 수 있는 가장 저렴한 투어는 무엇인가요?

Walks예요. 약 155달러부터이고, 최대 14명 그룹으로 약 2시간 진행돼요. 약 42달러부터인 자유 관람 입장권이 더 저렴하지만 오디오 가이드만 제공돼요.